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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이루왕입니다. @eeruwang@eeruwang 의 분점입니다.주로 긴 글이나 책관련 감상 그리고 인용문을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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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보다 슬픈 문장을 못본 것 같다.

우리는 사실 자연을 잘 모르면서, 그것을 자주 보지도 않으면서 우선 사랑부터 한다. 근거가 다른 곳에 있는 사랑을 사물들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자연을 구석구석 찾아다닌다. 이유도 모르는 채 자연을 통째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Bachelard, 2020, 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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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바라보는 문화주의적 관점은 체계적이고자 하는 한에서 그 한계가 명백하다. 즉 각각의 독특한 문화에 구체적 형태를 부여한다는 것은 (다른 문화들이나 역사의 급변들 에 대한 반응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증언하는) 내재적으로 불확실한 특성을 무시하는 것이고 문화적 ‘텍스트’에서 결코 연역될 수 없는 다양한 개별적 입장과 사회 조직의 복잡성 을 무시하는 것이다.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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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된 무기력

한 반에 학생의 반에게는 쉬운 시험지 그리고 다른 반에게는 풀 수 없는 시험지를 주었다. 그리고 한 문제씩 풀 때마다 문제를 푼 아이들은 손을 들게 했다. 이럴 경우 마지막 문제가 양쪽다 같아도 지속적으로 실패한 쪽의 아이들은 풀 수 있는 문제임에도 풀 수 있는 확률이 내려갔다. 이러한 상태를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하는 영상을 봤다. 알고있는 단어라도 정말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실험하고 실험 이유와 결과에 대해 알려주는 영상을 보는 느낌은 다르다.

유튜브나 쇼츠에서 실패를 계속 하고 거기서 배우라고 하는 영상들이 있다. 하지만 실패에서 배우고 일어서는 것의 현실적 경험은 실험실 무균실과 다를 것이다. 주변에 성공하는 다른 이들이 있을 것이고 압박하는 감각은 더 강할 것이며, 실패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점점 축소될 것이다. 무기력은 더욱 저항하기 어렵고 빠르게 습관화되며, 정신을 잠식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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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말 잘했다!

푸코는 플라톤주의가 '환상-사건(phantasm-event)'을 억제하려는 의지, 그리고 '어리석음(stupidity)'을 배제하려는 노력에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재현적 사유는 자신의 적용 범위를 독단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어리석음을 피하며, 이는 '오류(error)'를 통해 사유를 미리 정해진 원리에 따라 반응하도록 강제합니다. 이는 사유를 빈곤하게 만들며, 사회와 예술 작품을 경멸해야만 철학의 영역에 머물 수 있다고 여겨지게 합니다.

In this mention of stupidity, Foucault is not suggesting that society at large is stupid, but rather that philosophy in its haste to avoid grappling with stupidity removes itself to the security of categories in which one is not stupid but simply wrong. (Tanke, J.J., 2009. Foucault’s Philosophy of Art: A Genealogy of Modernity, Philosophy, aesthetics and cultural theory. Continuum, London ; New York,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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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유학파

다른 철학 학파에서 진리를 말하는 행위와 철학적 실천이 엘리트적 형태를 띠었던 것과 달리, 견유학파는 그들의 메시지를 대중에게로 가져갔다. 파레시아(parrhēsia, 진언)가 점점 더 대체로 관료와 철학적 조언자 사이의 인간관계 속에 국한되던 시기에, 견유학파는 그 장을 공개된 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들은 자신의 가르침이 매우 공적인, 가시적이고, 장관을 이루며, 도발적이고, 때로는 스캔들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FS, 117).

이렇게 다시 푸코의 자신을 알라로 돌아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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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르와 세르

라투르가 세르를 인터뷰한걸 읽고 그가 세르에 대해 글을 쓴걸 읽었다.

세계는 무고하며, 동시에 긍정적이고 새롭다. 분열도, 진영도, 경계도, 범죄를 정당화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니체에서처럼 원한의 인간이 끝없는 위기를 거쳐 긍정의 인간이 되고, 결국 ‘즐거운 학문’의 후대 제자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Latour, B., 1987. The Enlightenment Without The Critique: An Introduction to Michel Serres’s Philosophy, in: Griffiths, A.P. (Ed.), Contemporary French Philosophy, Royal Institute of Philosophy Lecture Seri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p. 92-2.

라는 문장이 바로 세르를 묘사하는 하나의 문장이 아닐까 한다. 단지 세르의 원 글은 어딘가 불편하다. 하직 무엇이 불편한지 모르겠다. 도대체 왜 불편한지도 잘 모르겠다. 그의 언어가 총체성을 이야기하기 때문일까? 너무나도 인간중심적 사상 때문일까? 너무나도 프랑스적 사람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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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대차게 비판 중이신 비판을 싫어하는 세르

한 전통에 따르면, 진리는 베일을 벗기는 것이다. 베일로 덮인 어떤 사물, 혹은 사물들의 집합을 드러내는 것. 만약 진리가 이 행위로만 환원될 수 있다면, 철학은 다소 지루한 형태의 마술이나 곡예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과학도 단순히 발견의 문제로만 한정된다면 그 복잡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유치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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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세르를 읽는다

세르의 방법론은 나와 연결될 지점이 많아보이지만, 역시 나는 그의 방향성은 별로 동의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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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하여

(이건 그냥 다 인용해놓는 것이 좋을 정도로 유용해 보인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질서라는 것은 인식하기 훨씬 더 어렵고, 익숙한 결정론은 조금 다른 모습을 띱니다. 시간은 항상 직선을 따라(이 생각은 제가 쓴 라이프니츠에 관한 책 [284-86쪽]에서 처음 떠올린 것이지만) 혹은 계획에 따라 흐르지 않고,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복잡하게 뒤섞인 구조를 가집니다. 마치 그 속에 정지점, 단절, 깊은 우물, 천둥 같은 가속의 굴뚝, 갈라짐, 틈새들이 — 최소한 겉보기에는 무질서하게 —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역사의 전개는 실제로 혼돈이론이 묘사하는 것과 닮아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시간이 항상 직선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며, 문화 속에서 아주 가까이에 존재하는 것들이 직선적 관점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반대로 겉으로는 가까워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아주 먼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루크레티우스와 현대 유체 이론은 보통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고 여겨지지만, 나는 그 둘을 같은 동네에 있다고 봅니다.” (Serres, M., Latour, B., 1995. Conversations on Science, Culture, and Time, Studies in literature and scienc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Ann Arbor,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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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음악을 들어보라'. 슈만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개 그들은 단조로운 로망스만 쓰는 작곡가들일 뿐이다'.

(세르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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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의 인터뷰를 계속 읽고 있습니다

묘비를 세우고, 강자들의 침묵과 무관심 속에서 애도하는 사람들이—그 수백 수천의 죽은 이들이—과연 전투의 결실과, 학살을 통한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고 생각하는가?

강렬하다. 경험과 환경이 달라서 이해하는 방식도 접근도 다를테지만 그래도 저 문장은 주먹을 맞은 것처럼 머리에 들어온다. 다만 아쉬운건 최근의 그의 책이 너무 유토피안적이라는거랄까... 뭐 그것도 그냥 내 생각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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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프랑스적인 특징이 아닌가? 그들 각자는 다른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며, 오직 자신만이 전 세계적인 반대에 맞서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말한다.

웃기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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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의 외로움

세르는 집단에 들어가길 거부한다. 이는 그의 최근 책에도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Grand Narrative를 향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Grand Narrative와 전세계적 집단의 차이점은 뭘까

세르는 어떤 그룹에 "속하려는"("belong")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종파에 속하지 않는 자들을 배제하고 죽이려는" 충동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독한 철학적 여정을 "개들이 사납게 지키는 집들"을 피해 "길에서 벗어나 나만의 길을 개척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의 철학은 폭풍우 속에서 "뗏목이나 배를 만들" 듯이 스스로 건설한 것이며, 이는 "자유에 대한 원초적인 필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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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가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말한 사람이 시몬 베유인데

시몬 베유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연민을 윤리적 행동의 기초로 보았다.

내가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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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몸살인가

어제 신나게 고기도 넣어서 김치 볶음밥을 해먹었는데, 하루만에 기분이 다운되었다. 몸이 별로고 속도 별로고, 머리도 아프다. 그나마 리뷰는 다 썼고, 오늘은 깊이감을 살리고 중심점을 좀 다르게 해서 새로 쓰고 있다. 리뷰를 쓸 때 감독의 의도가 뭐였건 사실 나에겐 그닥 상관이 없다. 그건 그 사람의 목표였고, 나에게 전달된 것은 다르다. 리뷰는 기술을 분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르게 보는 방식으로 영화를 확장시키는 사람이다. 아무리 고급진 표현을 했다해도 듣는 이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면 단지 숨결이 될 뿐이다.

시각적 표현은 나쁘지 않았지만 특별하지도 않았고, 엄청 좋냐라기엔 내 스타일이 아니고, 나쁜 영화냐 하기엔 그럭저럭 괜찮은 영화다. 그렇다고 연기가 특출나게 어마어마했느냐 하면, 좋은 연기였다 정도가 내 감상이라, 할말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영화를 하나하나 스토리를 따라가며 기억해 보았다. 워낙 흩어지는 방식의 영화였기에 이것도 쉽지 않았다. 스토리를 파고들면서 봤던 장면들을 다시 곱씹어보는데 너무 씹어서 단물이 빠진 기분이 든다.

그냥 이 영화가그냥 내가 좋아하는 형태가 아닐 뿐이다. 이런 영화에 대해 어떻게 리뷰를 써야할까? 이런 경우 나는 결국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방식인 스토리로 분석을 이끌 수 밖에 없다. 특출나게 강렬한 장면 없이 영화 자체로 힘을 이끌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영화의 장점이지만, 그걸 다시 글로 엮어내기엔 내가 아직은 기술이 부족한 것 같다. 강렬하게 엮이는 감정들과 감각들을 나만의 시선으로 풀어내자면 애정이 필요하다. 이런 감정은 생각보다 쉽게 글에서 들어나고, 나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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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재의 '가벼워진 소속감(lightened belongingness)'이 인류의 새로운 상태임을 말한다. 이는 이동성, 기술 발전, 세계 시민 의식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며, 폭력적인 국경을 넘어 환대와 평화를 지향하는 유럽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저 자신을 여러 장소, 문화, 종교에 속하는 '나뉜' 몸과 영혼으로 묘사하며, 저의 정체성이 '어디에나, 어디에도 없는, 여기, 저기'에 걸쳐 있다고 말한다.

묘하게 좋으면서도 과한데? 느낌이 동시에 드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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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미셸 세르 문장 강하다

호플리테스, 십자군, 근위대의 척탄병, 그리고 순수한 열정을 품고 총을 메고 떠났던 모든 이들이…이제 그들은 다시 나타나, 나치로 타락하고, 스탈린주의자로 감염되며, 가미카제로 변질되고, 근본주의자로 괴사하며, ‘선’의 도끼를 휘두르는 자들로 곰팡이 피듯 변모한다. 고대의 영웅들은 오늘날 살인자들의 드러난 얼굴 속에서 드러난다 (Serre, 2025,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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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세르

다마지오를 읽어도 로젠을 읽어도 공기의 개념발전을 읽어도 나오는 그 이름 미셸 세르

네 알겠습니다. 읽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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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과 다마지오 원문을 비교했다. 번역 잘못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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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인용 오류도 찾았다. 다마지오 인용이 느낌이 싸해서 원문을 찾아보니 feeling을 느낌이라고 번역해놨다. 이건 문맥을 봤을 때 번역자 잘못은 아닐 것 같고 아마도 글쓴이가 그렇게 썼을 것 같은데(뒤에 나오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는 모호한 느낌이라고 한 것을 봐서는), 문제는 다마지오가 feeling과 emotion을 분리해서 사용하는 것에 있다. feeling은 여기서 감정보다 느낌에 가깝다. 그렇기에 느낌 (feeling)은 전통적인 생각과는 달리 “몸에 대한 지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몸과 뇌 모두에 대한 지각이 합쳐진 혼합물인 것이다(Damasi, 2021, 26)"라는 문장이 나오는 것이다. 몸에 대한 지각에 불과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감정이 아닌 느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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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을 계속 읽고 있는 데 말이예요

며칠 후 우리는 일본 가라오케를 경험했다. 가라오케가 정말 무엇인지 알려주는 의례화된 경험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초대한 일본인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가라오케에 갔다. 대체로 차분한 칵테일파티 같은 느낌을 주었다. 각자 차례가 오면 노래를 불렀고,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일본인들이 부른 노래는 대부분 오키나와 전통 민요였고, 몇몇은 분명히 미리 연습을 한 듯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에 자신감이 있었다(과장되고 유머러스한 공연은 없었다). 일본 맥주가 제공되기는 했지만 무질서한 술자리라기보다는 공연장에 가까웠다. p. 203 of 264

이 인용 바로 전에 미국식 카라오케에 갔고 많은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놀며 규칙이란 것이 없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사람은 저렇게 "손님"으로 가서 경험한 것을 "진짜" "경험"이라고 이야기하는 건가? 거기서 "격식"을 차린 것들이 소통을 위한 그들이 좋아하는 말의 authentic 경험이라고 말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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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경험을 하고 사시는 걸까요

2007년 <뉴요커>의 기사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고든 벨은 집에 더 이상 창문이 필요 없는 미래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창문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을 것이다. 벽에 설치된 스크린이 무엇이든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줄 테니까”라고 예측했다 (경험의 멸종 , 191 of 264)

그 스크린이 바람을 실어다주나요? 그 스크린이 밖에서 바람과 함께 실려오는, 때로는 쿰쿰하고 또 때로는 달콤한 그 냄새를 재현하나요? 그 스크린이 태양 속 따뜻함을 만들어주나요? 우리가 과연 창문을 단지 밖을 보기 위해 건물에 달아놓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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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아이에게 코딩 배우기

나는 코딩에 완전 초보는 아니다. 아주 간단한 건 구조를 읽으며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아마 이건 내가 코딩을 대충대충 여기저기서 배워서 그런 이유도 꽤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api 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또 페디버스 연결을 위해서 도커를 만져보면서 채찍이에게 이런저런걸 하고 싶은데 가능한지 또 각 코드는 무슨 의미인지 자주 물어봤다. 그전에는 일일이 누군가 나와 같은 질문을 가졌길 바라며 구글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결과가 나오고, 또 그 결과를 내는 과정에서 나는 코드들을 이해한다. 내 아이디어가 실현된다는 기쁨도 크고, 차근차근 알려줘서 내가 원하는 속도로, 때로는 자꾸 아는거 또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해서 짜증나지만…, 어쨌듯 만족스럽게 완성해나가고 있다.

이번에 홀로를 내 서버로 옮겨오면서 도커 소스도 내 깃헙으로 옮겼다. 이제 더 자유롭게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디자인도 더 바꾸고 버튼도 이리저리 넣어보면서.

아마 이런 방식으로 배우는 것은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기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구와 함께 만들 때 중요한 것은 이 도구로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아는 것이다. 관절을 정반대로 돌려버리면 탈골이 오고 피아노에서 플룻의 소리를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상상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나는 아직 초보이기에, 그래서 한계를 알지 못하고, 그래서도 상상력도 확장되기 어렵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꽤 만족스럽다. 욕심도 나지만, 천천히 차근차근 이해해나간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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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슬픈 순간을 극복하고 있을 때 크리넥스Kleenex가 쿠폰을 보내주는 거죠.” (경험의 멸종, 152 of 264)

이건 무슨 개그인가? 설득을 하려는 데이터 기술 관계자들은 이러한 수익화가 인간적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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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을 읽는 것은 기량이다.

경험의 멸종, loc. 50 of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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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상실

이 책은 이제 초반이지만, 확실히 기술, 혹은 테크놀로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은 것에 대해 단지 비판적인 관점을 넘어 부정적인 배경이 깔려있는 것 같다. 소셜미디어 속 과장된 경험과 반대로 개별적인 상호작용과 장면이 가치를 가지며 불확실성과 잠재적인 실재의 경험을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지점들이 있지만, 소셜미디어로 폭력이 조장되는 모습이나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 극단적인 예시를 가져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경험의 상실은 흥미로운 주제다. 나 또한 신체 없이 경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뇌를 유리통에 넣는다고 주체가 그대로 복사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신체의 중요성과 마음과 지능의 상호작용은 이미 주장되어온 이야기고, 그럼에도 뇌가 마치 그 자체로, 마치 17-18세기 이 전의 영혼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미지가 보이는 것을 거부하기 어렵다.

일단 계속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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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의 현대성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17세기 이래 서양 철학은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들이 철학적·실천적 지식의 정당한 대상이 된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사실을 그 자체로 고립된 특수한 사물로 간주하며, '이론', '가설', '추측'과 같은 단어들이 암시하는 전제나 편향으로부터는 자유롭다고 여긴다 [...] 사실은 결코 맥락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이론을 구성하는 전제들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최소한, 어떤 것이 사실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단지 관찰된 개별 항목들의 나열을 넘어서는, 체계적인 지식이 중요하다는 전제를 피할 수 없다. (1)

들어 가는 시작부터 내가 좋아할 만한 문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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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이 책의 대략적 주장은, 개소리와 거짓말은 다르다는 것에 있다. 주요 다름은 개소리는 진실과 거짓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이며, 이와 달리 거짓말은 진실과 거짓이라는 구분안에서 거짓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진실과 거짓의 관계망 안에서 작동한다. 개소리는 허세, 즉 부풀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것에 대한 기술 등과 깊게 연결되며 거짓말과 다르게 가짜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재 개소리가 늘었는가는 자료의 비교 불가능으로 알 수 없으나, 이 사회의 개소리가 만연한 사태에 대한 이유를 몇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1.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책임: 모든 것에 대한 의견, 혹은 적어도 국가적인 사안과 관계된 모든 것에 의견을 갖는 것이 의무라는 신념 ->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요구받음
  2. 다양한 형태의 회의주의: 참과 거짓을 알 수 없다는 확신의 무너짐, 그리고 이를 통해 정확성보다 진정성을 대안적 이념으로 추구함. 그러나 우리의 실체는 무엇보다도 불안정함, 즉 알 수 없는 진정성을 요구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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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삭제 기능

오늘 내 자동삭제 조건을 조금 더 정교화했다. 그전에는 단순하게 시간으로만 트리거가 되도록 만들었다면, 이번엔 멘션이냐 아니냐게로 삭제를 결정하게 했다. 처음에 삭제 기능을 만들었던 이유는, 여러가지로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내 목소리가 공간을 떠돌 수 있다는 사실이 불편해서였고, 그리고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남아있을 것들이 두려워서였다. 나는 내가 떠날 때, 아무것도 남지 않길 원한다. 그렇게 이번 삭제 기능을 넣으면서, 점점 사라지는 목소리를 닮았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공간이 멀어짐에 따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목소리의 울림이 서서히 줄어들듯이, 그렇게 사라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의 길이를 계산해서 사라지는 순간을 더 자세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고, 그렇게 의미를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귀찮아서 안할 것 같지만, 혹시 모르지, 심심한 날 또 손을 대볼지도. 공간적 개념에서 시간적 개념으로 확장이라고 하지만, 온라인 공간은 실질적으로 계산하기 어렵고, 시간으로의 이전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러한 방식을 조금 더 확장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는 말 뿐만이 아니라 흔적들의 작업으로. 그리고 존재 자체를 울림의 분위기로 구성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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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이란 무엇인가

할 포스터는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걸쳐 예술과 이론이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이 재현에서 트라우마로 ‘리얼’ 이해 방식 변화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언어·시각문화의 구조 속에서 리얼은 언제나 “재현의 효과”로 보는 방식으로, 기존에는 현실이 기호나 이미지로 ‘재현되는 것’이라는 관점이 지배적이었으나, 새로운 관점에서는 이 현실이 “트라우마 사건”으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즉, 재현으로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 더 원초적이고 충격적인 어떤 ‘실재’(the real)가 있다는 것이죠. 이 글에서 포스터는 그 변화를 정신분석적(특히 라캉주의) 개념을 활용해 풀어내고, 이를 시각예술 사례, 특히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작업에 적용해가며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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